소설을 읽고 있자니 패러렐 월드Parallel World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니까 평행 세계, 병렬 세계 혹은 평행 우주와 같은 일종의 가상의
세상을 의미한다. 소설 속에서 오언 브릭은 평행한 두 세계를 오가는 존재이다. 그가 애초에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이쪽의 세계는 책을 읽는
우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저쪽의 세계는 이쪽과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쪽의
세계가 공유한다, 물론 대부분은 서로를 모르는 체로...) 전혀 다른 현실로 존재한다.
“2000년의 선거...... 대법원 판결 직후...... 항의 사태...... 주요 도시들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운동..... 의회에서 관련 법안 통과 실패..... 뉴욕 시의 시장과 구청장들이 이끄는 새로운 운동......
분리 법안이 2003년 주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연방파 군대가 공격해 왔다...... 올버니, 버펄로, 시러큐스, 로체스트......
뉴욕 시는 폭격을 당했고 8만 명이 죽었다...... 그러나 운동은 지속되었다...... 2004년에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메사추세츠,
코네티컷,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주 등이 뉴욕 주와 함께 미국 독립 주를 구성했다...... 그해 늦게 캘리포니아, 오리건, 위성틴 주 등이
떨어져 나가 퍼시피카라는 자체 공화국을 결성했다...... 2005년 오하이오, 미시간, 일리노이, 위스콘신, 미네소타 주가 독립 주들에
가담했다...... 유럽 연합은 새 국가의 지위를 인정했다......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어 멕시코, 중남부 아메리카 국가들,
러시아, 일본 등이 이들을 국가로 인정해 주었다...... 한편 끔찍한 전쟁은 계속 되었고 사상자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연방파는 국제
연합의 결의를 무시했다......” (pp.87~88)
그렇게 어느 순간 오언 브릭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쪽 세계의 필요에 의하여 저쪽 세계로 소환된다. 그곳은 여전히 미국이고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연방파와 독립주로 나뉘어 한창 전쟁 중이다. 그곳에서 오언 브릭은 군인이고, 어떤 인물에 대한
암살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지만 그 임무는 저쪽 세계가 아니라 이쪽 세계에서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하사,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많은 현실이 있는 거야. 단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리고 있어. 세상과 반(反)세상, 세상과 그림자 세상. 각 세상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누군가가 꿈꾸고
상사하고 저술하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고.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라, 이 말씀이야.” (p.96)
오언 브릭이 죽여야 하는 인물은 은퇴한 도서 비평가인 오거스트 브릴이다. 그는 현재 이혼한 딸, 그리고 남자 친구를 잃은
손녀딸과 함께 살고 있다. 그 자신도 얼마 전 아내를 잃었다. 그러니까 슬픔이 가득한 집안에서 늙어가고 있는 오거스트 브릴에 대한 암살 명령이
오언 브릭에게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암살 명령을 거부한다. 저쪽 세계로부터 이쪽 세계로 넘어온 다른 자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은퇴한 도서 비평가이고 72세이며 버몬트 주 브래틀보로 외곽에서 47세 된 딸과 23세 된 손녀와 함께 살고 있어. 그의
아내는 지난해 죽었지. 사위는 5년 전에 딸을 버리고 떠났고. 손녀의 남자 친구도 죽었어. 슬픔과 상처받은 영혼으로 가득한 집이지. 브릴은 매일
밤 어둠 속에서 눈 뜨고 누워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다른 세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pp.99~100)
소설의 한축은 패러렐 월드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작가는 소설을 한 번 더 비틀었다. (사실 소설은 그 시작 부분부터 비틀려
있다.) 그러니까 암살의 대상인 이 나이든 작가 오거스트 브릴은 슬픔이 가득한 집에서 때때로 상상을 하는데, 오언 브릭은 바로 그 상상 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이쪽 세상의 오거스트 브릴은 상상 속에서 오언 브릭을 창조하였고, 오언 브릭은 저쪽 세상으로 가 이쪽 세상의
오거스트 브릴에 대한 암살 지령을 받는 것이다.
(실은 이러한 비슷한 설정을 읽은 기억이 난다. 브로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들 중 한
권에서였다. 지은이와 책제목은 떠오르지 않지만 내용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 소설의 내용은 누군가를
찾아가 조용히 총으로 그를 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총이 발사되는 순간에야 소설가는 바로 그 범인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뭐, 이런...)
하지만 소설은 삼분의 이 지점을 넘어서면서 갑자기 평행 세계는 멀찌감치 밀어버리고 노인과 손녀딸 사이의 대화로 넘어간다. 그 긴
대화를 통해 노인은 손녀딸이 가지고 이는 죄책감, 그러니까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아 남자 친구가 이라크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쪽 세력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했다는 (그녀와 식구들은 그 비디오를 보기까지 했다) 자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다.
“... 오로지 선량한 사람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자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자는 자신의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삶을 살아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p.107)
위의 문장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도쿄 이야기>를 손녀딸과 함께 본 후 노인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인 며느리 노리코를
떠올리며 남긴 단상이다. 아마도 이 할아버지는 남자 친구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손녀딸의 선량함과 영화 속 노리코의 선량함을 평행으로 놓고
싶었으리라. 작가는 획기적인 형식과 독특한 이야기 구성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선량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넘겨짚는다. 어쨌든
‘이 괴상한 세상은 계속 굴러가고 있어.’라고 말할 수밖에...
폴 오스터 Paul Auster / 이종인 역 / 어둠 속의 남자 (Man In
The Dark) / 열린책들 / 252쪽 / 2008 (2008)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세련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아 온 폴 오스터의 최신 소설 어둠 속의 남자 . 오스터 특유의 기법이 잘 살아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스터의 소설에서 자주 보기 힘든 주제 의식을 담아 낸 소설이다.
72세의 은퇴한 도서 비평가 브릴은, 얼마 전 아내를 잃은 데 이어 교통사고까지 당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한꺼번에 겪으면서 불면의 밤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브릭 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브릴과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 주인공 브릭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메타 소설의 형태를 띤다.
마술사로 생계를 이어 가며 평범하게 살던 브릭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전쟁의 복판에 떨어져 있다. 그는 갑작스레 처한 자신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곧 이 모든 것이 브릴이란 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야기의 창조자인 브릴을 죽이는 것이며, 바로 자신이 그를 죽여야 한다는 지령을 받는다.
이야기 속 인물이 이야기의 창조자를 죽인다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과 이야기 밖 인물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브릭의 이야기와 브릴의 현실이 조응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들은 모두 자기 치유의 기능을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이야기하기〉에 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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