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넣고 다닐 만한 작은 책이 없어 책장에서 한 권을 골랐다.주로 버스에서, 거리에서 펼쳐 읽을 생각이었는데 첫 장을 읽고서는 집에 앉아 계속 읽게 되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단문으로 속도감 있게 풀어놓는 모모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비슷한 성장 소설로문득 먼 옛날 읽었던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떠오르기도 했다.버려진 아이라는 모모가 처한 환경을 생각하면 이야기는 어둡고 우울할 수밖에 없을테지만,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언정 우울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격이 가장 큰 이유일테지만, 그보다 모모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모모와 로자 아줌마, 그 두 사람의 사랑이 모모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매춘부, 불법이민자 등 등장하는 사람들의 생은 예상할 수 있듯이 당연히 힘겨울테지만 이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다.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도와주는 주변 인물들의 헌신과 사랑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보여준다.소설 첫 부분에서 하밀 할아버지에게 모모가 사랑에 대해 묻는 장면."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그렇단다."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사량해야 한다.사랑해야 한다.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 로맹 가리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휴머니즘의 작가’로 알려진 로맹 가리는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유태인이다. 2차세계대전 후 그는 세계 각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1956년에는 소설 하늘의 뿌리 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는 가명으로도 여러 소설을 발표했는데,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한 두번째 소설 자기 앞의 생 으로 한 작가에게 결코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가 되었다.
작가는 자기의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살고 있는 열네 살 모모의 눈을 통해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바라본다. 모모의 눈에 비친 세상은 결코 꿈같이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은 더욱 각박하고 모진 곳이다. 아랍인, 아프리카인, 창녀들, 노인... 모모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랑에 가득 차서 살아간다. 그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유태인 로자 아줌마를 비롯해 이 소외된 사람들은 모두 소년을 일깨우는 스승들이다. 소년은 이들을 통해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동시에, 삶을 껴안고 그 안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는 법을 배운다.
자기 앞의 생 은 ‘삶에 대한 무한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아픈 소설이다. 모모의 등에 지워진 삶의 무게는 산을 오르기는커녕 어린 그에겐 가만히 서 있기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가슴 아픈 것은 어린 모모의 인생을 짓누르는 그 삶의 무게가 아니다. 하지만 어린 모모는 그 무거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인생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시니컬한 냉소로 그 무게를 떨쳐내려 한다.
새롭게 번역 출간된 자기 앞의 생 은 프랑스 메르퀴르 드 프랑스 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새롭게 번역된, 그야말로 정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로맹 가리 사후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된, 로맹 가리의 유서라 할 수 있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 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로맹 가리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조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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