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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길

시를 사랑하는 시 72맛있는 열매를 먹고 싶은 마음으로― 사과의 길 김철순 글 구은선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14.4.30. 9500원  우리 집은 가을이 깊을 무렵부터 겨울까지 날마다 감알을 즐깁니다. 아침 낮 저녁으로 으레 감알을 썰어서 아이도 어른도 즐겁게 먹습니다. 다만, 이 감알은 봄이 다가오면 거의 떨어지고, 봄으로 접어든 뒤에는 더 구경하지 못합니다.  봄하고 여름에는 감알을 구경하지 않기도 하고 딱히 먹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커다란 가게에 감알을 덩그러니 놓겠지요. 도시에 있는 커다란 가게에서는 한겨울에도 수박이 있고 딸기가 있으니까요. 바나나 같은 열매는 네 철 언제나 놓여요. 더구나 바나나는 시골에서조차 네 철 언제나 구경할 수 있습니다.봄볕을 / 접었다 폈다 하면서 / 나비 날아간다 / 나비 겨드랑이에 들어갔던 / 봄볕이 / 납작 접혀서 나온다 (나비)이제 감나무 밑 동네가 환해질 거야 / 왕관을 쓴 베짱이 노랫소리에 / 모두들 흥이 나서 일을 할 거야 (감꽃 왕관)  그리 멀지 않은 옛일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우리 집 큰아이가 2015년에 여덟 살인데, 내가 여덟 살이던 1982년을 헤아리니, 그무렵에는 겨울로 접어들 무렵 비로소 맛본 열매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감이나 능금이나 귤 같은 열매는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될 즈음 널리 먹습니다. 이러다가 봄을 맞이하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여름에도 구경하지 못해요. 그러나 봄이나 여름에는 이즈음 만날 수 있는 다른 열매가 있습니다. 살구와 오얏이 무리익는 봄을 한껏 북돋우고, 복숭아랑 포도랑 참외가 잇따르지요.  김철순 님이 빚은 동시집 《사과의 길》(문학동네,2014)을 읽으면서 제철에 먹는 열매가 하나둘 떠오릅니다. 요즈음 우리 집 아이들이 신나게 먹는 열매를 가만히 떠올립니다. 다른 집에서는 어떠한지 모르나, 우리 집 아이들은 감이랑 바나나가 있으면 감을 먹습니다. 감이랑 능금이 있어도 감을 먹습니다. 감이랑 배가 있어도 감을 먹어요. 감을 다 먹고 나서야 바나나나 능금이나 배를 쳐다봅니다.  그런데, 무화과하고 감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무화과에 먼저 손이 가요. 무화과 옆에 다른 어떤 열매가 있어도 무화과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무화과하고 수박을 함께 놓는다면 달라질는지 모르나, 무화과하고 수박은 서로 익는 철이 달라서 밥상에 함께 놓일 일이 없습니다.엄마는 / 착한 일을 할 때마다 / 반짝이 스티커를 / 붙여 주신다 (별)아이들은 / 학원 가고 / 숙제하고 / 텔레비전 보느라 // 무궁화꽃이 핀 줄도 모르고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심심해서 / 무궁화 혼자 꽃을 피웠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버이한테서 모든 것을 물려받습니다. 어버이한테서 피와 뼈와 살을 물려받을 뿐 아니라, 마음결도 말씨도 물려받습니다. 꿈이랑 사랑도 물려받는데다가, 눈썰미랑 손길이랑 몸짓도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아이들만 학원에 넣거나 학교에 보낸다고 해서 아이들이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어버이도 함께 배울 때에 아이들이 똑똑하게 자랍니다. 아이들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슬기롭게 거듭나지 않아요. 어버이도 함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키우고 넓힐 때에 비로소 아이도 어른도 함께 슬기롭게 거듭납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을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려서 주는 밥을 어릴 적부터 먹어요. 어버이(어른)가 스스로 즐기는 밥을 아이들한테 차려서 주기 마련이요, 아이하고 둘러앉은 밥상도 ‘아이 입맛’에 앞서 ‘어른 입맛’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어머니 손맛이든 할머니 손맛이든, 모두 어른이 아이한테 물려주는 밥맛이에요. 그러니, 어른 스스로 밥을 새롭게 지어서 새로운 맛을 찾을 적에는 아이도 새로운 맛을 차근차근 익힙니다. 어른 스스로 삶을 새롭게 가꾸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빚을 적에는 아이도 꿈을 새롭게 품으면서 새로운 하루를 즐겁게 북돋울 만합니다.엄마가 깎아 놓은 사과는 / 아주 달고 맛이 있어요 (사과의 길)해님이 나오니까 / 입을 / 꼭 다물고 있다 (우산)  동시집 《사과의 길》에 흐르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김철순 님이 빚은 이 동시집에 흐르는 이야기는 요즈음 나오는 수많은 다른 동시집하고 비슷하게 ‘아이가 학교에서 겪는 삶’하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가 집에서 어머니하고 부대끼는 삶’을 큰 줄거리로 삼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여덟 살이 되면 학교에 들어가고, 학교에 들기 앞서 학원을 다니기 마련이니, 이런 이야기를 동시로도 널리 쓸 만합니다.  그런데, 《사과의 길》을 비롯한 오늘날 한국 동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학교와 학원과 집안 이야기는 있되, 아이와 어른이 삶을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적이나 시험이나 숙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는다든지 고달픈 이야기는 어김없이 있지만, 아이와 어른이 저마나 가슴속에 꿈이나 사랑 같은 씨앗을 심어서 새로운 길을 걷는 이야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재미난 말잔치나 돋보이는 말놀이는 있되, 말 한 마디에서 사랑을 길어올린다거나 글 한 줄에서 꿈을 키우는 웃음이나 노래는 아무래도 동시로 그리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사람들에게 / 시원한 그늘 만들어 주느라 / 오래 팔 벌리고 있는 / 느티나무 / 아무도 없는 / 캄캄한 밤에는 / 슬쩍, / 팔을 내릴지도 몰라 (그럴지도 몰라)“이것도 몰라?” // 수학 시험 40점 맞았다고 / 우리 엄마 / 열 받았다 (수학은 정말 싫어)  우리 어른들은 어떤 동시를 써서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줄 적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기쁘게 웃거나 노래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험이나 성적이나 공부나 숙제나 학원을 놓고서 ‘어머니 마음에 잘 들 만큼 뭐든지 잘 해야’ 비로소 웃거나 노래할 만할까요?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학원이나 공부를 더 시키지 않을까요?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학원이나 공부는 더 끝없이 이어지지 않을까요?  아이들은 괴롭거나 고단하기 때문에 ‘현실을 잊도록 도와줄 만한’ 재미나거나 남다른 놀이를 찾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괴롭거나 고단할 줄 알면서도 정작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고단하게 내모는 틀’을 치우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한테 재미나거나 남다른 놀이를 장난감이나 인터넷이나 컴퓨터나 손전화나 놀이기구 따위로 내주려고 합니다.  나는 내 어릴 적을 돌아보아도 알 수 있고, 시골에서 늘 새롭게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아도 알 수 있는데, 아이들한테 이 놀이나 저 놀이를 가르쳐 주어야 아이들이 잘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장난감을 많이 사 주거나 선물해야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는 ‘놀 겨를’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는 ‘놀 곳’이 있어야 합니다. 놀 겨를을 주고, 놀 곳을 마련할 적에, 아이들은 누구나 스스로 놀이를 생각해 내어 기쁘게 즐겨요. 놀 겨를이 없거나 놀 곳이 없는 아이들은 골방에 스스로 갇혀서 손전화나 인터넷만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농사짓는 우리 할머니 /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 학교 끝나자마자 / 집으로 뛰었다 // 송글송글 / 등에 땀이 솟아난다 / 땀이 마르자 / 삐죽삐죽 풀이 돋아난다 (내 등에 풀을 뽑는 할머니)  맛있는 열매를 먹고 싶은 마음으로 씨앗을 심습니다. 맛있는 열매를 먹고 싶은 마음으로 나무를 언제나 곱게 돌봅니다. 맛있는 열매는 제철에 나는 열매인 줄 한 번 느낀 아이들은 ‘제철이 새로 돌아오는 날’까지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사월에 비로소 ‘제철 꽃’이 피고 오뉴월에 바야흐로 ‘제철 열매’를 맺는 딸기를 십이월이나 일월이나 이월에 아이들한테 먹이려고 애쓸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제대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지요. 햇볕과 바람과 비를 즐겁게 먹고 흙에 뿌리를 내려서 자라는 ‘제철 열매’가 가장 맛있을 뿐 아니라 우리 몸에 가장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어야지 싶어요. 그리고, 제철 열매처럼, 아이도 어른도 제대로 철이 드는 제대로 아름다운 삶을 지을 수 있어야지 싶어요.  능금 한 알을 바라보면서, 감 한 알을 손에 쥐면서, 복숭아 한 알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랑스러운 길을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삶을 가꾸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동시가 되어야지 싶고, 시험공부나 입시나 숙제는 좀 옆으로 밀어놓고는,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하루에 다문 한두 시간이라도 마음껏 놀 수 있는 넉넉하고 따사로운 보금자리와 마을과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2.1.불.ㅅㄴㄹ(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 비평)

자연과 우주를 성찰케 하는 소박한 일상의 노래,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 2011년 한국일보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김철순 시인의 첫 번째 동시집김철순 시인은 1995년 제1회 지용신인문학상에서 시 「가뭄」외 한 편으로 등단한 후, 농부와 주부로서의 삶을 꾸준히 시어로 표현하며 시집 꿈속에서 기어나오고 싶지 않은 날 (1997) 오래된 사과나무 아래서 (2003)를 냈다. 그런 그가 오 년 전부터 동시에 관심을 갖게 됐다. 54세, 늦은 나이에 동심에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한다.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가 날뛰는 얼룩말로 보이기도 하고, 잘 익은 콩꼬투리에서 튀어나오는 콩알이 뻐꾸기 울음소리로, 가을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귀뚜라미 소리가 여름을 반으로 접어서 박는 재봉틀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땅을 일구는 삶을 살아온 시인은 자연에 가장 가까운 글을 일구어 나갔다. 그렇게 동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사과의 길」과 「냄비」가,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할미꽃」과 「고무줄놀이」가 나란히 당선되었다. 당시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 심사위원이었던 김용택, 이상희 시인은 그의 동시에 대해 아기자기한 이미지의 환상적 서사, 소박한 일상의 노래가 자연과 우주를 성찰케 한다. 라고 평했다. 그의 첫 동시집 사과의 길 은 엄마의 마음과 농부의 마음으로 담은 아이들과 자연의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오랜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그의 상상력은 아이의 눈높이에 살뜰히 맞춘 입말로 세계에 고착된 인식을 뒤흔든다. 나아가 대상을 둘러싼 환경, 대상의 이면까지도 응시하는 포용의 상상력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 준다.

책머리에

제1부 팔랑, 봄볕이 떨어진다
나비
봄맞이
달래
망초꽃
봄날
할미꽃
개구리 울음
콩 심는 날
꽃밭
풀들은 입이 없어서

제2부 내 귀를 물고 달아나는
귀뚜라미
꽈리나무 등
태풍

내 귀를 물고 달아나는
가을
감꽃 왕관
강아지풀
도토리
아기 쥐와 고양이

제3부 사과의 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사과의 길
빨랫줄과 빨래
빨래집게
가래떡
냄비
솜사탕
우산
주전자
콩나물국
염소 똥
까만 염소
가로등

제4부 깍두기 좀 치워 주세요
거울
그럴지도 몰라
수학은 정말 싫어
깍두기
카메라
개구리
뻐꾸기시계
산비둘기
엄마 흉내
고무줄놀이
등 굽은 나무
내 등에 풀을 뽑는 할머니

해설 | 함기석